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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100년 前 그 춥고 바람 불던 날처럼, 작아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습니다 - 조선일보

[사설] 100년 前 그 춥고 바람 불던 날처럼, 작아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습니다 - 조선일보

입력 2020.03.05 01:45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가 한국 신문 최초로 100년을 맞았다. 그 긴 세월 모진 풍상(風霜)을 견디고 오늘에 이른 것은 언제나 응원하고 질책해주신 독자 여러분의 덕이다. 조선일보는 우리 민족이 1919년 3·1 독립 만세를 외치며 흘린 피의 값으로 얻어낸 한글 신문이다. 나라가 세계지도에서 없어진 민족에게 남은 것은 오직 말과 글뿐이었다. 만약 그때 조선·동아일보와 같은 한글 신문이 발행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한글로 만들어진 신문은 그 자체로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에게 등불과 같았다. 희망과 용기를 지키는 작은 불씨이기도 했다. 말과 글을 잃지 않은 민족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 살아 있는 예가 바로 우리다.

잃어버린 나라의 이름 '朝鮮(조선)'을 제호로 달고 빼앗긴 글로 민족의 설움을 대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가시밭길이었다. 창간 5개월 만에 항일 시위를 폭력 진압한 일본 경찰을 비판한 논설로 첫 정간을 당했다. 복간하자마자 정간 조치에 항의하는 논설을 써 또 3일 만에 정간당했다.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광적(狂的) 신문'이라고 불렀다.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조선일보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 민족 진영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일보 사장을 맡아 '조선 민중은 조선의 산물(産物)을 사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아는 것이 힘이다. 민족의 얼을 지키자'는 한글 교육과 문자보급운동, 분열된 좌·우파 독립운동을 한길로 모았던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창씨개명, 한글 말살의 폭압 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동아일보까지 없애려 했다. 그 암흑기에 민족의 표현 기관으로서 일제 강압과 신문 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은 조선일보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다. 결국 일제는 1940년 8월 10일 조선·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켰다. 강요와 압박으로 잠재울 수 없는 민족 언론의 존재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8만8000여 건의 기사 압수, 500건 이상 기사 삭제, 네 차례에 걸친 발행 정지를 당했다. 3·1 독립선언 33인 중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았던 한용운이 조선일보 폐간 소식을 듣고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라는 시(詩)로 애달파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의 존재 이유와 역할이 모두 담겨 있다.

일제가 물러난 후에도 민족의 질곡은 끝나지 않았다. 6·25 남침으로 국토와 국민이 결딴나는 참화까지 겪었다. 이 어려운 시기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함께했다. 북한 공산군에 서울을 빼앗겼을 때 부산·대구를 전전하며 조그마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라도 발행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당시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이 이 초라한 타블로이드 전시판(戰時版)과 다를 바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우리글과 말을 지켰다면 대한민국 건국 이후엔 가난 퇴치와 산업 발전, 세계 무대 진출이라는 국민 모두의 염원과 함께했다. '선생님을 해외로' '한민족사 탐방' '쓰레기를 줄입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세계가 뛰고 있다, 우리도 다시 뛰자'는 운동은 우리 사회와 경제를 바꾸는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산업화로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된 뒤에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지켜왔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의 이 기적적 성취에 작은 벽돌 한 장이라도 놓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5100만 국민이 이뤄낸 번영을 2000만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선진 한국'도 반쪽에 그칠 수밖에 없다. 1964년 '납북 인사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끝에 101만명의 진정서를 유엔에 제출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단초가 됐다. 광복 70주년인 2015년 '통일과 나눔' 재단 기금 마련에는 170만명이 동참했다. 작년에만 단체 122곳에 100억4600만원을 지원했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존재 이유이지만 어떤 권력도 언론의 비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일제는 말할 것도 없고 제왕적 힘을 휘두르는 우리 대통령 권력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는 1960년 '투쟁하는 국민운동의 전개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설로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 의혹을 정면 비판했다. 4월 19일 자 고려대생 피습 사진 특종은 4·19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언론 통제를 위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켰다. 조선일보는 '민주 정치에 큰 오점을 찍었다'는 1면 사설로 반대했다. 정부는 공무원 가족 구독 중단, 기업 광고 중단에 신문 용지 공급까지 막았다. 그래도 조선일보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정부는 결국 언론윤리법 시행을 보류했다. 1973년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납치됐다. 수사는 한 달 넘게 겉돌았다. 당시 주필은 한밤중 윤전기를 세우고 '이 사건은 국민에게는 어이없고 견딜 수 없는 횡액(橫厄)'이라며 진상을 밝히라는 사설을 실었다. 서슬 퍼런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보도였다.

'민주화' 깃발을 들고 탄생한 정권들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보도에 세무조사로 보복하고 시민단체로 위장한 외곽 단체를 동원해 불매운동, 광고 탄압에 나섰다. 근래에는 권력 편에 선 매체들까지 조선일보를 공격하고 있다. 정치 상대방을 악(惡)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나아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언론까지 적대하는 현실이다. 영향력을 가진 조선일보는 언제나 이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엔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이용한 각종 괴담과 가짜 뉴스도 언론을 위협하고 있다. 광우병 괴담처럼 수만, 수십만 군중을 모으는 전례 없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때도 조선일보는 할 말을 해야 했다. 외로운 외침이었다.

오늘날 디지털 세계에서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는 정보는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있다. 양극화된 진영 논리의 무한 충돌만 반복되고 타협의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 상황에서 사실(事實)을 찾아 할 말을 하는 언론의 사명은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조선일보 역시 사실보다 속보에 치중하다 크고 작은 오보를 했다. 다시 한 번 사실 추구의 언론 본령을 되새긴다.

이제 새로운 100년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조선일보는 100년 전 그 춥고 바람 불던 날처럼, 작아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겠습니다.

1920년 3월 9일자 창간 3호의 1면/조선DB
1920년 3월 9일자 창간 3호의 1면/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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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4 16:45:0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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